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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백년 후를 바꿔낼 여성들의 치열함 담았죠” [인터뷰]

EBS 다큐 ‘여성백년사’ 3부작
연출 맡은 이혜진 PD 인터뷰

   

  여성백년사 포스터 이미지. EBS 제공         
여성백년사 포스터 이미지. EBS 제공

           

“단순히 역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연극처럼 짜여있어서 보는 내내 흥미로웠습니다. 짧은 영화를 보는 것 같았어요.”

<교육방송>(EBS) 온라인 게시판에 한 시청자가 남긴 <다큐프라임> ‘여성백년사’ 감상의 일부다. 지난 7~9일 방송된 ‘여성백년사’ 3부작은 한국사회가 직면한 젠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역사 속에서 찾는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뚜껑을 열어보니 여느 역사 다큐와 다른 형식적 참신함과 감각적 연출이 눈에 띄었다. ‘여성백년사’는 전문가 인터뷰와 재연 등을 분리하는 통상적인 역사 다큐와 달리,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역사 여행(1·2부), 현재에서 미래로 보내는 편지(3부) 콘셉트로 진행된다.

특히 1부 ‘신여성 내음새’편과 2부 ‘직업 부인 순례’편은 역사 속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화자로 나서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학자 심용환, 방송인 김현숙, 안현모, 이승국과 대화를 나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드워드 핼릿 카)라는 유명한 표현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같은 스토리텔링 예능 형식으로 구현한 셈이다.

‘여성백년사’ 3부작의 부제는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이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말도 남겼다. “역사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한 사람들이 아닌 기존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했던 사람들에 의해 진보했다.” ‘여성백년사’는 사회 격변기에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낡은 질서를 부수고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저항한 이들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연출을 맡은 이혜진 피디를 지난 15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 있는 교육방송 사옥에서 만났다. 

 지난 15일 경기 고양시 EBS 사옥에서 만난 이혜진 피디의 모습. 김효실 기자                                       
지난 15일 경기 고양시 EBS 사옥에서 만난 이혜진 피디의 모습. 김효실 기자

           

―‘여성백년사’는 언제 어떤 계기로 기획하게 되었나요?

“젠더를 주제로 다큐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교육방송>에 2009년) 입사한 초반부터 했어요. 역사 속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2020년 말에 일민미술관 전시회 ‘황금광시대: 1920 기억극장 프로젝트’를 관람했을 때였고요. <신여성> 잡지에 실린 피아니스트 윤성덕의 인터뷰를 낭독해주는 작품, <신여성> 편집실을 재연해놓은 공간 등이 인상적이었어요. 여성의 단발이 사회적으로 엄청난 이슈였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됐죠. 다큐로 담을 내용이 많겠다 싶어서 한 달 뒤에 바로 기획안을 냈어요. 기획안은 2021년 초에 통과됐는데, 당시 다른 다큐(‘예술의 쓸모’ 3부작, 2021년 8월 방송)를 제작 중이어서, ‘여성백년사’의 본격적인 기획·제작은 1년 전쯤 시작했어요.”


―기획안에 대한 내부 반응은 어땠나요?

“<다큐프라임>으로 방송하려면 1차 서류 심사, 2차 피칭(콘텐츠 제작 지원을 받기 위해 기획 의도, 제작 계획 등을 발표)을 통과해야 하는데요. 피칭 때 반응이 좋았어요. 오히려 제가 다큐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나친 자기검열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주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당시에 젠더 이슈가 첨예할 때라서 제가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죠.”


―실제로 제작할 때 부담을 느꼈나요?

“그동안 여성사를 다룬 프로그램이 많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이 방송에 기대하는 바가 제각각이어서 그런 부분이 부담스러웠어요. 누군가는 여성독립운동가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여성운동사를 다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식으로요. 기획안을 3부작으로만 낸 걸 나중에 후회했어요. 이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 줄 당시는 몰랐어요.(웃음)”


―결과적으로 1~2부는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 이야기에 집중했는데요. 1920~1930년대를 선택한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욕심 같아서는 백년 사이에 일어난 모든 사건과 우리가 알아야 할 여성들을 다 다루고 싶었는데요. 총 3회분을 만들어야 하니, 몇 가지를 뽑아서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1920년대로 시작한 이유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담은 기록물이 많은 시기가 이때부터여서 고요. 근우회 같은 여성운동 단체가 생긴 것도 이 시기죠.

당시 잡지를 보면 여성들의 고민 상담 꼭지가 있는데, ‘일자리를 갖고 싶은데 취업이 잘 안 된다. 집에서는 시집이나 가라고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같은 고민이 나와요. 이렇게 지금 여성들이 하는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목소리도 있고, 지금보다 더 진보적인 생각을 표현한 여성들도 있었어요. 우리(제작진)가 젠더 이슈에 대해 직접적으로 뭐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당시 여성들의 삶을 전달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각자 경험에 빗대어 생각할 거리가 있겠다 싶었죠.”


 EBS 제공     
EBS 제공

           

   

 EBS 제공     
EBS 제공


‘여성백년사’ 1, 2부에는 ‘최초의’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한국 여성 최초로 문학계에 등단한 작가 김명순, 머리를 단발로 자른 강향란, 택시 기사 이정옥, 미용사 오엽주, 경제학사 최영숙 등이다. 다큐는 ‘최초’라는 타이틀에 숨겨진 성불평등한 사회와 여성들의 분투를 조명한다. 사회적 주목을 받은 여성들은 남성들의 시기와 언론을 통한 공개적 괴롭힘을 겪어야 했다. 퇴학, 해고 등 2차 가해성 불이익도 빈번했다. 그래도 여성들은 차별에 맞서 싸웠다. 


―1~2부에서 배우들이 강향란, 오엽주 등 역사 속 인물을 연기하며 패널들과 대화를 나누잖아요. 왜 이런 형식을 선택하셨나요?

“형식에 대한 고민을 작가님들과 많이 나눴어요. 역사 다큐이고 여성에 대한 내용이라고 하면 ‘뻔하다’고 생각하는 다큐 형식이 있잖아요. 그러다가 작가님이 제가 피칭 때 피피티에 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포맷화(형식화)할 수도 있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시간 여행이라는 게 어색하고 과한 콘셉트로 여겨질 수도 있고, 기존 <다큐프라임> 이미지와도 많이 다르죠. 그래서 사실 이런 형식을 결정하는 데 연출자로서 용기가 필요하긴 했어요. 어설프게 만들면 내용과 형식 둘 다 놓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뻔하게 만들어서 아예 묻히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해서 시도해봤습니다.(웃음)”


―배우가 바뀔 때마다 옴니버스 연극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김명순 작가편에서는 당사자인 김명순 대신 “열렬한 팬” ‘독자 B’가 화자(텔러)로 등장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텔러(화자)는 인물에 대한 소개와 함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면 좋겠다 싶었죠.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인 송계월에게는 동생 송정덕이 있었고요. 김명순의 경우에는 주변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요. 김명순에게 응원의 편지를 남긴 사람이 있다는 역사적 기록을 보고 저희(제작진)가 ‘독자’라는 상상을 한 거죠.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편지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히 나와있지는 않았거든요. 저희는 김명순의 팬이라고 상상했고, 팬이라면 김명순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김명순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괜찮을 것 같았어요.”


―이름 있는 배우들이 아닌데 연기가 자연스러웠어요. 

“텔러들은 모두 오디션을 봐서 뽑았어요. 촬영 준비할 때 연기자 분들께 연극을 하듯 원테이크로 간다고, 그렇게 준비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사실 방송에 나간 것보다 대사가 훨씬 많은데, 연기자 분들이 완벽하게 해 주셨어요. 디테일한 사전 대본이 없는 현대 패널분들은 이런 형식이 어색할 수도 있었는데,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니까 패널들도 몰입하는 게 현장에서 느껴졌고요.” 


   

 방송 갈무리     
방송 갈무리

           


   

 방송 갈무리     
방송 갈무리

           

―역사를 재연한 장면들은 영화처럼 공들인 티가 납니다.

“시청자 분들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대충 적당히 만들면 외면받지 않을까 싶어서 역사 드라마 세트장도 빌리고 고증도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다큐 제작비가 많지 않으니 보조출연자는 최대 10명으로 제한해야 하는 등 한계가 있었는데요. 임형은 촬영감독님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잘 찍어주셨어요. 임 감독님은 <교육방송> 영상제작부의 유일한 여성 감독이기도 한데, 다큐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상태에서 즐겁게 촬영해주셨어요.” 


―김명순, 강향란, 송계월, 이정옥, 오엽주, 최영숙 외에 다른 후보들도 있었나요?

“사실 임정화 작가님이 1~2부를 위해 쓴 대본이 거의 6부 분량이라고 할 만큼 많았어요. 최초의 여성 노동운동가로 평가받는 강주룡, 영화 <밀정>의 실제 주인공 현계옥 등을 다룬 대본은 당장 방송 제작도 가능한 수준까지 나왔었고요. 다큐 분량상 인물을 추리는 과정에서 다 다루지 못한 게 안타까워요. 1부 엔딩 크레디트에 1분30초를 할애해서 다른 여성들을 조금씩이라도 소개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어요.”


―당대 많은 여성들의 삶을 살피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흔히 백년 전 여성사라고 하면, 가부장제의 희생양으로 수난을 당한 여성들의 역사를 떠올리기 쉽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실은 모든 여성이 한 명 한 명 각자의 방법으로 치열하게 살았구나 라는 걸 많이 느꼈어요. 김명순 작가가 소설에서 성폭행을 피해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시선을 비판하는 등 글로 맞서 싸운 것처럼요.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싸운 사람들이 많아요. 그걸 다 다루지 못한 게 여전히 남아 있는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EBS 제공
EBS 제공

           

‘여성백년사’ 3부는 현재와 미래의 대화다. 100년 뒤인 2122년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텔레그램 엔번방 성착취 사건을 담았다. 출연자는 ‘불꽃추적단’의 단, <한겨레> 김완·오연서 기자,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예영, 해일, 재영, 서희, 여름)이다. ‘여성백년사’는 엔번방 사건이 ‘매우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국사회에 만연한 ‘온라인 포르노 문화’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일임을 짚는다. 이를 위해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2018년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 서우영(가명) 씨도 목소리를 보탰다.


―3부에서 텔레그램 엔번방 성착취 사건을 주요하게 다룬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획 초기에는 1~3부 모두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서 보여주는 형태를 생각했어요. 그런데 너무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어서 제작진 개입을 줄이고 (다큐를) 보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더 두는 방향으로 바꿨죠. 백년 전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백년 후에 지금은 어떻게 기록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요.

3부는 원래 다양한 여성들이 백년 후 사람들에게 남기는 메시지로 구성하려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작가님과 제가 추적단 불꽃의 책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고, 이것만 다뤄도 충분하겠다 생각한 거죠. 백년 뒤에도 기록될 만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야기라고 판단했어요.”


―시청자 반응 가운데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요?

“저희 방송에서 다룬 여성들에 대해 추가로 더 찾아보고 공부한 걸 공유해주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방송을 본 뒤 ‘김명순 작가가 쓴 책을 주문했다’는 후기도 봤고요. 연출자로서 기뻤어요. 제가 방송에서 다 다루지 못한 부분에 대한 짐을 좀 덜어주시는 듯해서요. 또 시청자 분들이 행간을 잘 읽어주시더라고요. 지금 내가 하는 노력 하나, 행동 하나가 백년 후 세상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걸 느꼈다는 반응을 볼 때 뿌듯했어요.” 

   

EB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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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디는 ‘다큐를 아직 보지 않은 예비 시청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느냐’는 마지막 물음에, “1~3부가 각각 메시지도 있지만, 3부작을 함께 봐야 느껴지는 메시지가 존재한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1~3부를 모두 보시면,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아주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서 연대가 되고 역사를 바꿔나간다는 메시지를 더 강렬하게 체험하실 수 있어요.” ‘여성백년사’는 교육방송 누리집, 유튜브 채널, 웨이브, 티빙 등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기사원문 :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0684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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